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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도덕경 판본.

by 갸르송 2024. 1. 13.

노자는 춘추시대 초나라의 철학자이다. 기원전 3~10세기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정확한 기록은 없다. 허난시 주구시 루이현 사람으로 춘추시대 말기 주나라의 관리였으나, 뒤에 관직을 버리고 초나라로 이민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노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3명 있다고 적었다. 첫째로 이이를 예로 들었다. 그는 초나라 사람으로 공자에게 (禮)를 배운 사람이며, 도덕의 말 5천여 자을 제작한 사람인데, 그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두번째로 예로 든 사람은 역시 공자와 동시대의 노래자(老萊子)로서, 그의 저서는 15편 있었다 한다. 세 번째로 예로 든 것은 주나라의 태사담이라는 사람으로, 공자의 사후 100년 이상 지나간 때에 진나라의 헌공과 회담하였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노자는 은둔한 군자’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노자라고 하는 이는 은자로서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오직 도덕경이 책으로써 글귀만이 전해질 뿐이다.

노자가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인만큼 도덕경도 노자 본인이 쓴 원서는 없고, 여러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그 중 우리가 도덕경이라고 규정한 대표적인 판본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삼국시대 말기에 위나라의 왕필이 정리한 것이다. 이를 일명 왕필본 혹은 통용본이라고 불리운다.

두번째는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하상공(河上公)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이다.

새번째로 학자 부혁이 전한 부혁본이다.

이 3가지 중에 왕필본이 으뜸으로 인정되어 대부분 도덕경 원본이라 함은 왕필본으로 통용되고 있다.

그리고 일부만 남아있지만, 둔황(敦煌)에서 발견된 당사본(唐寫本)과 육조인사본(六朝人寫本)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道德經碑)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하지만 왕필본의 권위는 20세기에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어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20세기 초반에 발견된 돈황 문헌에서 노자의 판본이 발견되면서, 왕필본의 내용이 진짜 노자 원본대로인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약 5천자, 81장으로 되어 있다.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道經),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德經)이라고 한다. 이어서 보편적으로 도덕경이라고 불리운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지만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보기가 어렵다, 여러 횟수에 걸쳐 수정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수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현재와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추정된다.

 

1973년도에 중국 장시성에서 발견된 고분 마왕퇴에서 발굴된 백서본에 담겨있는 원문들은 왕필본과 크게 다름이 없었다. 그에 더해 마왕퇴에서 발견된 도덕경 판본은 왕필이 편집한 통용본보다 훨씬 앞서서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자면, 왕필본의 저본이 바로 백서본인 셈이며, 왕필이 정리하기 이전에 중국의 여러 사서에 인용된 판본도 이 백서본인 셈이다. 백서본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백서본 갑본으로서 전국시대 말기에 작성되어진 것으로 추정되어지고, 을본은 한나라 초기(BC 195년 이전)에 제작된 판본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하여 노자가 한대 이후에 만들어진 위작이 아니라는 주장에 가중이 더해지게 되었다. 또한, 백서본은 편집 순서가 왕필본과 다르게 상편(도경)과 하편(덕경)의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어서, 본래의 노자는 덕경-도경 순으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도덕이란 어휘도 이 책에 의해 퍼진 것인데, 이 내용들로 미루어보아 도덕경이 아니라 덕도경이 되게 된다.

 

1993년에 후베이성 징먼시 궈뎬촌의 한 전국시대 말기 초나라 무덤(기원전 3세기 초 이전) 곽점에서 대나무 죽간에 쓰여진 노자의 사본이 출토되었다. 《노자》가 한대 이후 위작되었다는 설은 완전히 일소되었다. 곽점에서 출토된 사본을 '죽간 노자', '초간 노자', '곽점 노자' 등으로 부르지만 보통 '죽간본'이라고 통칭한다. 죽간본은 갑, 을, 병본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후 연구결과, 백서본은 죽간본 《노자》의 주석서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죽간본은 실존하는 《노자》의 가장 오래된 판본이 되었다.

 

곽점본과 백서본의 차이점은 다음 항목들과 같다.

  1. 곽점본의 내용 상당수가 백서본에는 없으며, 백서본에 없는 내용 일부가 곽점본에 있다. 곽점본은 2,000여자로 백서본의 40% 정도의 분량이다.
  2. 곽점본은 대나무에 쓰인 반면에 백서본은 비단에 쓰였다.
  3.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의 내용에는 조금씩 추가된 것들이 있으며 문장 형태가 말끔해지는 경향이 있다.
  4. 백서본이 곽점본에 비하여 정치술수적인 내용을 더욱 많이 지니고 있어, 백서본 성립 시기에 유행한 황로학의 영향을 받아 통치술에 대한 내용이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5. 곽점본에 비해 백서본이 더욱 반 유가적인 경향을 보인다.
  6. 백서본은 음양사상을 받아들여 기화론적 우주생성론의 내용을 담고있다.
  7. 백서본에는 전사과정의 기본적인 오류와 원래는 주석이었으나 옮기는 과정에서 본문으로 들어간 오류 등이 확인된다.

왕필본과 백서본 그리고 곽점본의 차이만 본다고하더라도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내용처럼 노자가 함곡관을 넘는 도중 도덕경의 5,000여 자를 남겼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도덕경은 단기간에 작성된 것이 아니고 고대부터 전국시대 말기를 지나면서 발생한 다양한 가치관과 사상들이 결합되어 성립된 책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런 복잡한 성립과정은 안타깝게도 도덕경 한 책 안에 여러 모순된 사상이 뒤섞여 존재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도덕경에 모순과 여러 사상이 뒤섞여 있는 만큼, 각각의 사상가와 학자마다 도덕경을 판단하는 기준이 달랐는데, 하상공장구는 양생술의 기반이되는 음양사상의 기본 경전으로서 평가했고, 왕필주는 도덕경에 담긴 형이상학적인 면모를 흠모하여 신비주의학적으로 평가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 학자와 사상가들이 저마다 무위자연주의, 반유가주의, 반법가주의, 음양가 사상, 무정부주의, 병가 여러 사상들의 근간이 되는 저서로 여겼다. 그만큼 읽는 이가 해석하기 나름인 책이다.

 

참고 : 위키피디아, 나무위키, 한국학중앙영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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