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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의 사상과 매력

by 갸르송 2024. 1. 16.

노자와 사상이 비슷하지만, 노자는 '공을 이루고 뒤로 물러나야 탈이 없다', '백성들에게 (어떠한 것을) 하려고 하지 마라'라는 일부 내용들로 미루어보면 정치술에 가까운 내용들이 있지만, 장자는 정치보다는 세속을 초탈한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현실에 적용하면 진짜 산속에 들어가서 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세속의 이념들을 넘어서 더 높은 시야에서 세상을 조망하고 대처하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고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 있어 의미가 있고 실용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장자에도 정치술과 관련된 대목이 있긴 있다. 하지만 장자 사상의 핵심은 '어떤 것을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볼 수도 있으니,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의 법칙(도)을 따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자'는 것이지, 노자처럼 '통치자는 일을 많이 만들지 말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는 식의 정치적 조언은 아니다.

장자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삶은 '맞다 or 아니다' 중 하나로 즉 이분법이나 흑백논리에 의해 정해지지 않으며, 두 개의 상반된 가치는 마치 하나로 이어진 도르래와 같아서, 둘을 나누어서 단정하지 말고 큰 하나로 보아 더 넓은 식견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상황에 맞게 조절해 나가는 것이다.

똑같이 시시비비를 가른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인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상태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과, 상대적인 관념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시시비비를 가르는 것은 결과는 똑같지만 있어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전자가 훨씬 성숙하고 고차원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작은 생각에 머물러서 옳고 그름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따지지 말고, 하늘을 뒤덮는 대붕처럼 크게 생각해서 너그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좀생이처럼 사소한 거로 속 썩이지 말고 크게 생각하라는 얘기이지 않을까 싶다.

우주의 관점에서 말이다.



물론 살다 보면 별의별 희한한 상황을 다 겪으며, 배신도 당해보고, 아무 이유 없이 괴롭힘도 당해보고 나쁜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날 것이다. 최고의 복수는 앙갚음이 아닌 성공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 했던가?

그래. 다 좋다. 크게 생각하고 용서하고 남을 미워할 에너지로 자기 자신의 발전에 힘 쏟으며 인자하고 지혜롭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다루는 것. 좋은 말이다. 좋지만,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 같다.

중요한 건 방향이고 인식이다.

내가 이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더라도, 이상적인 게 무엇인지 안 상태에서 이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 것과, 그 이후 이상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태도만으로도 다분히 성숙하고 현명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추한 사람도 인기가 많을 수 있으며, 장애를 가진 사람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모든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다 같은 것이다.



장자의 사상을 최대한 쉽게 요약하자면 서양의 언어로 표현했을 때'라고 얘기할 수 있다. 모든 의견은 결국 각 개인의 한정된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이른바 보편타당한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모쟁이나 여의 같은 미녀를 두고 남자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하지만, 물고기는 그녀들을 보자마자 물속 깊이 들어가 숨는다"는 장자의 속 우화처럼, 우리의 판단은 모두 각자의 한정된 경험과 환경, 처지에 따른 것이므로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할 수는 없다.

오리발이 짧은지, 학의 목이 긴지, 그 길고 짧음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사물 간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짧은 것만 있다면 짧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고, 긴 것만 있다면 길다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존재해 줄 수 있게 해주는 대상이며 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한정된 '내 관점'에만 집착하지 말고 '상대의 관점', '사물의 관점', 더 나아가서 '우주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사소한 사건들을 조망하며 시시비비를 가리고 세세히 살펴보자는 것이 장자의 주장이다.

장자 제2편에 나오는 '엷은 그림자'와 '본 그림자'의 대화는 사물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 연관성을 묘사하는데,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존재의 바탕이자 움직임의 근원은 도(道)일 수밖에 없음을 나타낸다. 결국 선악, 미추, 고저, 장단 같은 것들은 독립한 절대 개념이 아니라 빙글빙글 돌며 서로 의존하는 상관 개념이라는 것이다. 태극 무늬의 음과 양이 균등하게 서로를 감싸고 있는 모습과도 같은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호접지몽의 이야기도, 물아일체의 신성함이나 인생무상 같은 것의 호소를 추구했다기보다,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듯이 가상과 실재의 구분은 모호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한 가장 대중화되어 있는 조삼모사의 일화도 사건의 본질이 하나임을 깨치지 못한 원숭이들이 사물의 양면을 파악하지 못하고 당장의 입장에 따라 자신의 관점을 바꾸는 어리석은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가장 대중화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해석도 굉장히 다양하다.

그렇다면 장자가 말하는 노란 무엇이며, 어떻게 이것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일까? 일단 장자는 "도라 말할 수 있을 것은 도가 아니다"고 말한 노자의 노선을 따른다. 한마디로 절대 진리는 말이나 문자로 나타낼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한쪽만을 절대시하는 독선에 빠지지 않고 양쪽을 전체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시시비비를 따지는 분별지(分別知), 즉 이분법적인 사고를 초월해야 하며, 좌망(坐忘: 앉아서 잊는다)과 심재(心齋: 마음을 가다듬는다)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를 잃어버린 상태(吾喪我)에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유롭게 노닐다 보면 그것이 곧 양생이 되고, 처세의 도가 된다는 것이다.

당대 사상가들이 대부분 성인(聖人)의 권위를 빌리거나 지배 계층에게 조언하는 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풀어나간 데 비해, 장자는 특이하게도 동물, 자연물, 또는 이름 없는 민중(백정, 수영하는 사람, 수레 만드는 사람 등)이나 하급 관료와의 대화 등을 이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물론 장자의 일화에는 공자나 양주 같은 이들과 대화하며 이들보다 더 큰 통찰력을 보여주며 대화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그마저도 권위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국가 철학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민중의 생활철학으로 남았을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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