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해의 신 약이 말하였다.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 바다에 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 벌레에게 얼음에 관한 얘기를 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비뚤어진 선비에게 도에 관하여 얘기해도 알지 못하는 것은 가르침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물가를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야 당신의 추함을 알게 되었다. 당신은 이제서야 위대한 도리를 얘기하면 이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천하의 물은 바다보다 더 큰 것이란 없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며, 한때도 멈추는 일이 없는데도 차서 넘치지 않는다. 미려에서는 바닷물이 한때도 그치는 일 없이 새어나가는 데도 물이 말라 버리지 않는다.
봄이나 가을에도 변화가 없고, 장마가 지나 가뭄이 드나 영향이 없다. 이 바다가 장강이나 황하의 흐름보다 얼마나 방대한 것인가는 수량으로 계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으로 스스로 뛰어났다고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자신은 하늘과 땅으로부터 형체를 물려받았고 음과 양으로부터 기운을 물려받았다. 나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어서는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이렇게 나의 존재를 작게 보고있거늘 어찌 스스로 뛰어났다고 생각할 이가 있겠는가?
사방의 바다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크기를 헤아려 보면 소라 구멍이 큰 연못가에 나 있는 정도와 비슷하지 않은가? 중국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크기를 헤아려 보면 큰 창고 속에 있는 곡식알 하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물건의 종류에는 몇 만이란 숫자가 붙는데 사람은 그 중 하나를 차지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 곡식이 생산되는 곳과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에 널리 살고 있는데, 사람이란 그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사람을 만물에 비겨 본다면 말의 몸에 난 한 개의 가는 터럭과 같지 않은가?
오제가 천자 자리를 서로 물려준 것이나, 삼왕에 이르러 서로 다툰 것이나, 어진 사람이 근심했던 것이나, 일을 맡은 사람이 수고를 하는 것이나 모두가 이와 같은 작은 일이다. 백이는 왕위를 사양함으로써 명성을 얻었고, 공자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얘기하여 박학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고 있었지만, 당신이 조금 전까지 스스로 물 가운데에서는 뛰어나다고 생각하던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원래 장자에서 유래된 이야기이지만 이후 동해의 거북에게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을 자랑하자, 거북은 바다는 물론 이 세상의 크고 넓음을 다 이야기 해준다. 이를 들은 개구리는 크게 놀라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는 이야기로 변형되었다.
우물 안에서만 사는 개구리는 하늘의 넓이나 바다의 깊이를 우물만큼의 넓이와 깊이로만 이해한다는 뜻.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거나 세상물정 모르는 존재가 상식적이고 폭넓은 문제나 진리를 제대로 이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 주로 쓰인다.
이 문장이 참 뼈를 때린다. 나도 나의 뚜렷하고 매니악한 취향과 사고방식에 갇혀서 보편적인 세상을 많이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남들보다 튀어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유소년기 시절부터 툭하면 잔병에 걸려 내과에서 약을 달고 살았다. 그때는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성분들에 절여져 마치 장아찌가 된 기분이었다.
양약의 부작용이었는지, 유전적인 문제였는지, 후천적인 관리의 문제였는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장이꼬이거나 실신을 하여 응급실에도 여러번 실려가곤했다.
초등학생때는 폐병으로 입원을 하여 건강이 없으면 기쁨도 슬픔도 없이 공허함만이 남는 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행히도 초반에 홍역을 치뤄서인지 중, 고등학생때는 건강하게 지냈다.
하지만 20대 내내 원인 모를 신경통에 시달렸다.
헬스, 스트레칭, 괄사맛사지, 요가, 필라테스, 정형외과, 한의원, 명상, 주파수 할 수 있는 건 다해봤다.
통증이 일시적으로 완화, 악화를 늦추는 정도뿐이었다. 깨어있을 때도, 잘 때도 이 신경통은 나를 좇아다녔다.
수년간의 노력 뒤 포기하고 있을 즈음, 항상 무기력하고 신경통에 시달리다가 발기부전이 생겼다.
매우 충격을 받고 그 뒤로 안 가리고 할 수 있는 것은 다해보았다.
내 맨살에 뜸도 떠보고, 침도 놔보고, 한의원에 6개월간 다니며 침, 추나, 한약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돈을 날려도 좋았다. 더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전에 했었던건 다 대충했던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호전은 되나 근본적인 원인 해결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 뜸 공부를 하러 간 곳에서 우연히 KSNS를 알게 되었다.
그냥 누르고 문지르기만하면 정형외과, 한의원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통증이 해결된다고..?하곤 천천히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론이 납득이 갔고, 시도해보았다.
결과는 그동안 내가 해본 모든 시도들 중 최고였다.
그렇게 나는 KSNS에 푹 빠졌다. 주변에 무릎, 발목, 골반 여기저기 아픈 친구들은 많았기에 이런 방법이 있다고 추천해주었다.
반응은 1. 천천히 알아보고 실천
2. 다음에 해볼게. 얘기해줘서 고맙다
3. 그거 플라시보 아니야?
로 나뉘었다. 의외로 3번이 참 많았다.
참 신기하게도 3번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궁핍하다. 1번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거나, 안정적이지 않더라도 경제 이외의 면에서 상당한 입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우연히 최근 일들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받아 들일 때 태도가 어떻냐에 따라서 삶의 결과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라는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지금의 나도 기존의 내 생각을 깨고 새로운 생각과 경험을 해왔기 때문에 이만큼 올 수 있었다.
동시에 반대로 얘기하면 아직도 이 정도 밖에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큰 사람이 되기 어려웠었나보다.
앞으로도 새로운 것을 계속해서 배워나가고 싶다. 더 큰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조망하고, 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