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蝴蝶與,蝴蝶之夢為周與?周與蝴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그런데) 갑작스레 깨고 보니, 곧 놀랍게도 장자였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꿈에 장자가 된 것인가, 알지 못하겠구나. 장자와 나비는 틀림없이 구분이 있는 것인데.
이를 일컬어 '물物이 되었다'고 한다.
말뜻 자체가 상당히 모호하기도 하고, 딱 이렇다 하고 명확하게 그 뜻을 풀이하기 어려운 고사성어 중 하나이다.
이렇게 보니 장자의 이야기는 해석하기 나름인 것이 참 많다. 그만큼 이 글귀를 읽는 독자의 시선이 참 중요하다 느낀다. 현대미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 다르게도 해석이 가능하다. 흔히 인생의 덧없음을 뜻하는 말로 남가일몽이나 일장춘몽과 같은 뜻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화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야기 내에서 어떠한 후회나 회한이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정적인 내용이 없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자연 사물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아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라는 이야기로 읽혀지기도 한다. 이런 해석에서는 내가 언제든지 자연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오히려 인간에게 요구된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도의 관점, 우주의 관점이라고도 표현할 수도 있다.
장자는 나비의 꿈을 꾸었을 때 덧없거나 허망하다는 감정보다는 놀랍고도 신기하다는 감정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을 넘어서서 마치 스스로가 '나비가 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기에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구분이 있다. 그러나 만물의 변화(物化)의 원리, 즉 자연의 커다란 도(道) 속에서 그것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느 한 관점에 갇혀있을 나(我)는 존재하지 않으며, 만물에는 구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주의 나비 꿈'은 역으로 '나비의 장주 꿈'과 차이가 없다.
더 나아가 내가 원래 장주라는 사람인지 나비인지는 중요하지도 않다. 도는 그저 끊임없이 운행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위적인 구분은 오로지 인간의 관점일 따름이다. 제물론의 다른 부분들을 봐도 장자는 역동하는 도를 인간의 인식하는 수준으로 정의내리기가 어렵다고 본다.
이를 통해 장자는 그 무엇에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불변하는 가치는 존재하지도 않고, 세상만물은 모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적인 가치임을 말하고자 한다. 사람의 가치판단은 참으로 뱁새와 같이 세상을 좁게 보는 것이다.
다만, 이 사유가 특별히 동양적인 것인가? 혹은 동양이 선점한 주제인가? 라고 묻는다면, 사실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이 서양에서도 이와 같은 생각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계속 되어온 것이다. 각자 표현 방법에 약간의 차이만 있지, 결국 동서양 구분 없이 철학자라면 모두 비슷하게 했던 고민이며 의문인 것이다.
또, 여러 신화적 사유에서 자주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각은 근대에도 보인다.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확신도 이른바 '꿈의 가설'을 통과한 이후에 나오는 진리이다.
물론 근대 이후에 이러한 사유는 점점 서양철학사에서 사라지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러나 현대로 들어가면서 다시 프리드리히 니체가 관점주의적 태도를 취하면서 장자와 유사한 생각들을 펼쳐나간다. 여러모로 장자는 니체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니체와 장자의 유사성을 주제로한 책도 있다.
그리고 니체의 영향을 받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이런 사유들이 오히려 철학계 내에서 흔히 보여지는 보편적인 생각들이 되어 버렸다. 질 들뢰즈가 '동물 되기'라는 철학적 사유를 진행한 것이 대표적인 예.
동양에서도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불교가 바로 이 분야 관련연구의 정점을 찍는 사상이기 때문에, 상당히 오랫동안 고찰되어 온 주제인 걸 알 수 있다.
초기 경전과 불교 설화들을 살펴보면 인간이 되었다가 동물이 되었다가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장자사상은 현재까지도 불교사상과 매우 많이 얽히며, 관련 비교학 지식과 학계연구가 상당량 축적되어 있다. 필자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만약 딱 하나만 믿어야한다면 불교를 믿을 것 같다. 그만큼 도가 사상과 불교 사상이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이 사상은 공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쉽게 고민에 빠질 만한 주제이기 때문에 반대로 관련 논의가 없었던 곳을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다. (장자는 INFP였을지도..?)
우리가 체험하는 현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논하는 주제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사고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두고 서양과 동양으로 구분해서 한쪽을 우월, 혹은 열등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장자의 생각에도 맞지 않거니와 매우 잘못된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서로가 자각한 현실이 사실은 꿈속에서 자각한 자아였을지 당사자는 구분하거나 알 수 없다는 이러한 철학과 사고실험의 발상은, 코즈믹 호러장르의 가공의 신화에 등장하는 아자토스의 개념이나, 개인의 꿈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생각의 주체가 바뀌긴 했지만 시뮬레이션 우주론과도 어느정도 맥락이 일치한다. 호접지몽과 유사한 개념들을 꼬리물고 꼬리물고 공부하다보면 주객전도가 되어 공부를 위한 공부가 되어버리는 것을 경계하자. 애초 궁금했던 목적을 잊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