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장자. 아내의 죽음.

by 갸르송 2024. 1. 28.

 

장자의 처가 죽자 혜시가 조상(弔喪)하러 갔다. 장자는 그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동이를 두드리면서 노래하고 있었다. 그를 본 혜시가 말하였다.
"부인과 함께 살아왔고, 자식을 길렀으며, 함께 늙지 않았는가. 그런 부인이 죽었는데 곡을 안 하는 것은 물론,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르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네. 그가 처음 죽었을 때에야 나라고 어찌 슬픈 느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태어나기 이전을 살펴보니 본시는 삶이 없었던 것이고,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형체조차도 없었던 것이었으며, 형체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시 기운조차고 없었던 것이었네. 흐리멍텅한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그것이 변화하여 기운이 있게 되었고, 기운이 변화하여 형체가 있게 되었고, 형체가 변화하여 삶이 있게 되었던 것이네. 지금은 그가 또 변화하여 죽어간 것일세. 이것은 봄, 가을과 겨울, 여름의 사철이 운행하는 것과 같은 변화였던 것이네. 그 사람은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서 편안히 잠들고 있는 것일세. 그런데도 내가 엉엉 하며 그의 죽음을 따라서 곡을 한다면 스스로 운명에 통달하지 못한 일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곡을 그쳤던 것이네."

 

莊子妻死,惠子弔之,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惠子曰:「與人居長子,老身死,不哭亦足矣,又鼓盆而歌,不亦甚乎!」莊子曰:「不然。是其始死也,我獨何能無概然!察其始而本無生,非徒無生也,而本無形,非徒無形也,而本無氣。雜乎芒芴之間,變而有氣,氣變而有形,形變而有生,今又變而之死,是相與為春秋冬夏四時行也。人且偃然寢於巨室,而我噭噭然隨而哭之,自以為不通乎命,故止也。」

 

---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면서 철학자야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라고 말한 바 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파이돈이라는 저서에서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먹고 죽는 날 슬픔에 사로잡힌 가족들을 밖으로 보내고, 친구들과 죽음과 그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 대하여 철학적 대화를 나눈 이야기가 실려져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몸은 죽을지라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것을 논증하며 친구들과 담담하게 이성적으로 명철하게 죽음과 영혼에 대하여 논했다. 소크라테스의 4부작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부분을 읽다보면 웃음이 나온다.

죽는 날 이렇게 태연하게 대화를 철학적이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죽음의 두려움을 떨쳐내는 참으로 고급스럽고 성숙한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신념대로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라면 슬퍼할 이유는 없다. 본질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영혼 무게 실험도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영혼이 되고 난 뒤에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없고 육체가 있었을 때의 지식과 지혜만으로 살아가야한다고 장난스럽게 가정해본다면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와 대조할만한 이야기가 바로 위의 장자 아내의 장례식 이야기이다. 아내의 주검을 놓고 장자는 잠시 슬퍼하다 이내 멈추고 죽음을 이 우주의 관점에서 조망한다. 결론은 삶이란 본래 없었다는 사실을 포착하게된다. 황홀함 > 기운 생김 > 형체 생김 > 삶 > 형체 없음 > 기운 없음 > 황홀함의 순환 과정에서 삶이란 잠깐 동안의 모습일 뿐이다. 

우주에서 별이 사라졌다 다시 생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본다. 우주의 떠돌아다니는 원소들이 모이고 부딪혀 별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별의 형태는 사라지지만 그 원소들은 그대로 우주속에 남아 다시 떠돌아 다닌다.

이 사실을 장자는 2~3천년전에 깨달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ㅎㅎ

이 순환과정에서 삶이란 잠깐 동안의 모습일 뿐이다.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방 안에서 말이다.

오히려 아내는 우주속으로 해방되었기에 노래로 축하할만한 일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스러운 계절의 순환처럼 말이다.

어차피 삶이란 물질들이 뭉쳐져 잠깐 형태를 갖고 있는 것 뿐이니 영원히 살 것처럼 너무 많은 것을 지려고 하지 말고 즐겁게 살다 가라는 뜻이지 않을까 싶다.

 

서양철학이 죽음을 불멸로 극복하려고 했다면, 동양철학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변화로 수용한다.

 

 

수년전에 현생은 미뤄두고 와우를 하루에 몇시간씩 꼬박꼬박 했었던 시기가 있었다. 판타지라곤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에게도 눈길도 주지 않았던 필자가 와우의 스토리에 푹 빠져들어 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궁금해하며 열심히 퀘스트를 깨나아가고 그 세계관을 부지런히 탐험하고 느꼈다. 

반면에 함께 게임을 하던 지인은 현대인 여느 사람이 그렇듯 길드라는 무리 안에서 1등이 되고 싶었고,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어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돈도 많이 벌어서 멋진 아이템을 사입고, 가장 강력한 무기와 가장 희귀한 아이템을 찾아나섰다. 참으로 유가적인 삶인 것이다.

같은 게임을 하는데에도 이렇게 스타일이 달랐다. 같은 인생을 사는데에도 참 다양한 방식의 삶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이 최고로 옳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는 것은 있다.

그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 그렇게 주욱 살면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도중에 이 방법이 별로인 것 같으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살면되고. 그렇게 수정하면서 사는거다.

 

도가 이 세상을 만들었는지, 예수님인지 부처님인지 알라신인지 티탄인지 컴퓨터 프로그래머이신지 어느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와우 안에 있는 모든 컨텐츠를 경험하는 것은 와우 플레이의 본연에 집중하는 것이다.

제작자의 의도에 맞게 플레이하는 것이다.

제작자가 만들어놓은 세계관을 오롯이 경험하는 것이 플레이어로서의 제작자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이 지구의 모든 컨텐츠를 오롯이 경험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창조주에 대한, 삶에 대한 예의인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