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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양생주편 포정해우

by 갸르송 2024. 1. 18.

포정해우라는 사자성어의 포정은 사람이름이요, 해우는 소를 잡아 뼈와 살을 발라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포정해우'라고 하면 기술이 매우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사자성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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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정이 문혜왕을 위하여 소를 잡은 일이 있었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나 어깨를 기대는 곳이나 발로 밟는 곳이나 무릎으로 누르는 곳은 푸덕푸덕 살과 뼈가 떨어졌다. 칼이 지나갈 때 마다 설겅설겅 소리가 나는데 모두가 음률에 들어 맞았다.

그의 동작은 상림의 춤과 같았으며, 그 절도는 경수의 절주에 들어맞았다. 

 

문혜왕이 말하였다.

 " 아아, 훌륭하다. 재주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를 수가 있는가?"

 백정이 칼을 놓고 대답하였다.

 " 제가 좋아하는 것은 도로서 재주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았을 적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소였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완전한 소가 보이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감각의 작용은 멈춰버리고 정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천연의 조리를 따라서 큰 틈을 쪼개고 큰 구멍을 따라 칼을 찌릅니다. 소의 본래의 구조에 따라 칼을 쓰므로 힘줄이나 질긴 근육에 부닥뜨리는 일이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에야 부딪치겠습니까? 훌륭한 백정은 일 년마다 칼을 바꾸는데 뼈를 자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의 칼은 십구 년이 되었으며, 그 사이 잡은 소는 수천마리나 됩니다. 그러나 칼날은 숫돌에 새로 갈아 내온 것과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엔 틈이 있는데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틈이 있는 곳에 넣기 때문에 횡하니 칼날을 움직이는데 언제나 반드시 여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십구년이 지나도 칼날은 새로 숫돌에 갈아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뼈와 살이 엉긴 곳을 만날 떄마다 저도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조심조심 경계를 하면서 눈은 그곳을 주목하고 동작을 늦추며 칼을 매우 미세하게 움직입니다. 그러면 뼈와 살이 후두둑 떨어져 흙이 땅 위에 쏟아지듯 쌓여집니다. 그러면 칼을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만족스런 기분에 잠깁니다. 그리고는 칼을 닦아 잘 간수해둡니다. "

 

문혜왕이 말하였다.

" 훌륭한지고 ! 나는 백정의 말을 듣고서 삶을 기르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이처럼 어느 분야에 거의 달인의 경지에 이르러 신기에 가까운 솜씨를 자랑할 때, 이를 일러 '포정해우'라 한다. 또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서 소를 잡을 때 뼈와 살이 다치지 않도록 긍경을 잘 찾아 살을 잘 발라냈다는 데서 연유해, 사물의 급소를 잘 찌르고 요점을 잘 찾아내는 것을 '긍경에 닿다'라고 표현하기도한다.

 

장자는 백정의 수준을 3 가지로 나눕니다.

첫번째, 달마다 칼을 바꾸는 자들은 족포(族庖)라 칭한다. 족포는 자연의 결을 가리키는 천리(天理)를 어기고 무리(無理)하게 칼을 움직이느라 자주 뼈를 건드리기 때문에 칼날이 쉽게 상하고 무뎌지게 된다.

두번째, 해마다 칼을 바꾸는 자들을 양포(良庖)라 칭한다. 양포는 뼈를 건드리지는 않지만 힘줄이며 살을 억지로 자르려고 하다 보니 칼날이 다치지 않을 수가 없다.

세번째, 19년 동안 수천여 마리의 소를 잡았지만 쓰던 칼날이 새 칼처럼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지에 다다른 포정이다. 포정은 도와 천리에 따라 칼을 움직이므로 칼을 쓰지 않는 것과도 같다.

장자는 포정해우를 통해 사람이 자연의 흐름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자연을 욕망에 충실하게 가공하거나 세상을 어떤 방향(목적)으로 끌어가려는 시도를 부정했다. 그렇게 하면 칼을 자주 바꾸는 것처럼 사람을 다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알 수 있듯 장자는 주역과 마찬가지로 자연에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끼어들어서 바꿀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우화는 하나의 기술이 마음과 합치되면서 예술적인 경지로까지 오를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의 ‘도’는 깊은 집중력의 마음과 노력의 결과인 현실적 기술이 연결된 경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해부학적 지식이 있다면 동물을 해체, 정육할 때 상당한 이점이 있다. 초심자는 관절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힘들어 힘으로 뼈를 잘라내지만, 관절의 형태를 정확히 알면 어디에 칼집을 넣어야 인대가 끊어지는지 알 수 있고, 근육의 이는 곳과 닿는 곳을 알면 고기에서 뼈를 발라내기 수월해진다. 춘추시대에 체계적인 동물 해부학이 있었을 리 만무하기 때문에 경험의 가치를 강조하는 우화라할 수 있겠다.

 

소를 정신으로 대하되 눈으로 보지는 않으며, 소 몸통의 자연스런 문리를 따라 조금도 억지 없이 춤추듯 칼을 놀린다는 것이다. 그처럼 모든 일에 자기를 버리고 대상에 대한 의식 없이 자연의 원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삶을 기르는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가운데의 올바른 도'를 따름으로써 법도를 삼는다는데 대한 증명이다. 그러나 자연을 따르되 백정이 칼을 놀릴 때처럼 어려운 고비에는 스스로 두려운 듯 경게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하였다. 이는 자연을 따르는 어려움을 인식시키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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